수상작품

디지털 아트(넌인터랙티브) 부문

가라히나 어
© Junko Hoshizawa Sedlak 1998
우수상

가라히나 어

CG 동영상(개인제작)

작가: Sedlak 호시자와 준코

(일본)

MOVIE

※재생 플레이어 다운로드

작가 프로필

Sedlak 호시자와 준코

Sedlak 호시자와 준코

대학 졸업 후, 미술학교에서 디자인을 배운다.
세이부 백화점 미디어 사업부에서 비디오 제작.
그 후, 미국, 런던, 도쿄, 호치민, 싱가폴로 이주하여 18년간, 디자인이나 멀티미디어 관련 일에 종사.
92-98년, 미국 광고대리점 베이스 도쿄, 베트남 오피스 시니어아트 디렉터.
98년 이래, 싱가폴에 재주.
'JUNKO'S GRAPHICS' 설립.
각국 수많은 개인전, 그룹전을 개최, 출판, 서적 등 다수.

수상 소감

히라가나 형태의 재미와 표음으로 놀아 보았습니다. '읽는' 다는 의식을 빼면, 히라가나는 단순히 기호이며 재미있는 디자인입니다.
음표문자에 다양한 감정이나 톤을 투입하면, 문자 하나가 여러 가지로 표정을 바꿉니다.
읽는 글자로서 인식할 수 없는 외국 사람들이 본다면 보다 더 즐거울 것입니다.

선정 이유

표음문자인 히라가나라 하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 연속으로 사용된다. 작가는 이를 제각각 분해하여 의미를 배제한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단순한 색조와 형상의 CG히라가나와 국적을 알 수 없는 분위기의 발음이 경쾌한 리듬으로 전개되며, 보는 자로 하여금 즐거움과 초현실감을 느끼게 하는 가작이다.

Winner's Interview

──역시 어릴적부터 그림을?

그림색칠만 하던 아이였죠. 매일1권, 길가에서 팔고 있는 것을 부모님이 사주셔서 크레용이나 색연필로 그렸습니다. 그다지 남과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치원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서 그림만 그렸습니다. 판화대회나 콩쿠르에서 상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조용히 뭔가 그리는 것이 좋아서 성격도 어두워지고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아주 명랑한 친구를 만나서 처음의 어두운 성격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고교에 들어가서 음악을 시작하게 되어 당시는 호크, CSNY나 가로를 좋아해서 저도 밴드를 결성하여 1년에 2,3회 콘서트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외향적이 되었습니다.

──대학은 미술대가 아니라 , 일반대학이군요.

네, 경제학과죠(웃음). 미술계 전문학교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고교가 진학 학교라서 말이죠, 그냥 그런 추세여서 대학시험을 쳤더니 합격해버려서 갔죠. 미술공부는 나중에라도 할 수 있고, 대학과 병행해서도 할 수 있어서요. 캠퍼스라이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죠. 대학에 들어갔더니 연극에 흥미가 있어서 연극부에서 4년동안 아방가르드적인 작품들을 했죠.

──당시로는 최첨단이지요. 영향을 받은 인물이 있다면...

역시 반체제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도 헐리우드 초대작보다, 유럽영화의 작은 극장에서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고다르, 펠리니, 스즈키 세이쥰의 작품을 보거나, 영국 감독, 뭐라고 하더라, 테오ㆍ앙게로풀로스? 그런 작품들만 보았습니다. 아트는 팝 아트로, 워홀이라든가, 재스퍼 존즈라든가, 한편 은퇴한 대가이지만 피카소, 미로(Milo), Klee, Kandinskii등도 좋아했습니다. 역시 졸업하면 미술학교에 가려는 마음은 계속 있었는데, 연극에서도 여배우를 하고 무대미술이나, 선전미술도 직접 했습니다. 취미로 데생이나 드로잉을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입학금을 내기 위해 돈도 저축해서 결국 들어갔죠. 동양미술학교 그래픽 디자인과에 입학했습니다.

──그 무렵에는 벌써 일도 하셨습니까?

그럼요. 학교에 들어가서 곧바로 프리랜스로 하고 있던 아트 디렉터(director)에서 조수로 일하기 시작 했습니다. 신궁앞(神宮前)에 사무실이 있어서 전통(電通)이나 박보당(博報堂)의 일이 많았습니다. 한편, 학교의 과제도 많았는데 일주일에 이틀은 밤을 새야 했습니다. 2년간 상당히 충실했었죠.

──그 무렵에 벌써 컴퓨터를 사용 하셨나요?

전혀요. 학교에서 나와서 20명 정도의 작은 디자인 사무소에 3년 정도 근무하고 그 뒤 세이부 백화점에 들어 갔습니다. 거기에서 겨우 컴퓨터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선샤인에 있던 미디어 사업부에서 비디오 텍스라는, 당시의 말로 뉴미디어......뉴미디어는 사어(死語)군요(웃음), 그것의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디오 텍스라는 것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설명이 필요하죠

음, 그것이야말로 인터넷의 선구자였습니다. 호스트 컴퓨터가 동경에 있는데, 세이부 백화점이나 북쪽에서 남쪽까지의 그룹점포를 독자노선으로 연결하여, 점두에 설치한 단말기로 손님이 뉴스나 이벤트 등의 정보를 찾을 수 있죠. 당시 회장이 새로운 모노를 좋아해서 실현 불가능한 계획을 세워서 몇 십억 엔이나 들여서 만들었는데 결국 3년 만에 걷어 치워버렸습니다. 그것은 역시 액세스의 느림이나 콘텐츠에 문제였었죠. 홋카이도 사람이 어째서 동경의 정보를 알아야만 하는지와 같이 말이죠. 모처럼 단말기가 설치되어 있어도 조작이 키보드기 때문에 요즘처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었죠. 실험적인 색 배합이 강했지만 이런 실험이 있었기 때문에 하이테크는 발전하는 것이죠.

──어떤 기계로 만들었습니까?

NEC의 PC100 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125색을 예쁘게 낼 수 있었는데 그림이 자랑거리 였습니다. 게다가 관련회사가 만든 오리지날 드로잉 소프트를 통하게 하여 만듭니다. 그 소프트를 사용하여 , 스스로 조금씩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상당히 많이 모여서 이케부쿠로 세이부안에 있는 아트리에 누보라는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지금 보면 부끄럽지만, 아주 단순한 20~30초의 애니메이션 그것이 최초의 디지털 작품이랄까요? 85년 인지 86년 정도.

──그렇군요. 디지털 아트로서는 빨랐군요.

네. 신문이나 잡지에서 취재하러 올 정도였습니다. 그 뒤 같은 플로어에 티켓 세존이 있었는데 그 티켓이나 포스터의 디자인도 하고 있었죠. 그 뒤 세이부를 그만두고 프리랜스가 되지만 광고 디자인을 하면서 돈이 모이자 미국으로 놀러 가는 생활이 시작됐죠. 처음에는 로스엔젤레스에서 1개월, 곧바로 뉴욕으로 가서 3개월 있었습니다. 견문을 넓히러 갔죠. 무언가 영감을 얻고 싶어서 갤러리를 둘러보았습니다. 이렇게 아트뿐만 아니라 생활도 다르죠? 시점을 바꾸어 보는 연습이라고 할까 감각을 전환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 쪽에서는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마침 MacII가 나오기 시작할 무렵으로 굉장히 흥미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무렵 페이지 메이커라든가 프리 핸드를 사용하여 잡지를 디자인하는 무브먼트의 리더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바무매거진의 마이클 고즈니라고 알고 있습니까? 그 분 댁에 가서 급료는 필요 없으니 일을 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바무매거진의 편집디자인을 했습니다. 존 오덤 어소시에이츠라는 디자인 회사에 매일 다니면서 Mac을 조작하면서 레이아웃과 일러스트를 했습니다. 와오로 유명해 진 젝 데이비스도 같이 있었죠..

──굉장하군요. 개척자들 뿐이군요

네. 그들에게 배운 것은 컴퓨터 사용방법이나 태도 입니다. 기계를 사용하는데 멋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우선 감각이 있고 그 도구로서 사용하는 거죠. 센디애고에 살고 있을 무렵 주위의 아티스트들을 보아도 언제나 그 사람들의 재능에 기계가 지고 있죠. 우리들은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오면 와- 하고 감탄하지만 그들은 SE나 모노크로의 기계로 무엇을 만들까 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중요하니까요.

──가본 곳은 미국이 중심입니까?

샌디에고에 이어, 친구 아파트가 비어있다고 해서 런던으로 갔습니다. 미국은 살아 봤으니까 이번에는 유럽이 괜찮겠지, 하지만, 영어밖에 안 되니까 영국이 괜찮을 거라는 그 이유뿐이었지만요. 그러자 또 미국과는 전혀 감각이 달라서 아주 신선 했습니다. 동경에 돌아온 후, 배이츠 재팬 이라는 외자광고 대리점의 크리에이티브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잠시 바쁘게 샐러리맨을 하고 있다 보니 그런 자극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호치민의 베이츠에서 일하기 시작 했는데, 남편의 전근도 있어서 동남아시아로 가게 됩니다.

──그러한 국제경험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군요.

하나는, 제가 아시아 사람이니까 밖에서 본 아시아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죠. 그리고 한국과 싱가폴 거리에서 자신이 모르는 말이 나오면 재미있습니다. 말을 모르기 때문에 문자 자체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거죠. 한글도 그렇고 아라비크도 그것만으로 디자인으로 보인다는 것을 느꼈죠. 그렇다면 일본어를 모르는 외국인이 히라가나를 보면 디자인으로서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이 수상작의 사고방식입니다. 의미를 가지지 않는, 보는 일본어 그러니까, 외국인이 들어도 물론 모르고 일본사람이 들어도 모르는 문장을 만들어 보았습니다만, 그 외에도 동경의 간판을 사용한 작품도 그 문자의 의미를 뺀 비쥬얼로서의 의미를 보이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현재는 모션픽쳐만 하고 싶습니다. 종이도 하고 있지만, 영화는 하고 있으면 즐거우니까요. 그 다음 흥미가 있는 것은 음이나 영상, 춤 등 아트미디어를 믹서한 퍼포먼스 계열의 것 . 그곳에 있는 사람이 즐거워 지는 것을 만들고 싶습니다.

Works 히라가나이야기 1998 『히라가나이야기
  MTV Station ID - M을 점령하라! 1998 『MTV Station ID - M을 점령하라!
  MIV-Made In Vietnam 2000 『MIV-Made In Vietnam
  도쿄간판전쟁 2002 『도쿄간판전쟁